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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말기에 간으로 전이…“엄마 끝까지 포기하지 마”위암 말기판정…위·비장·림프 제거 수술…3차부턴 비급여 치료

중국에서 온 유태옥씨…생계 위해 딸 친정에 맡기고 한국행
위암 말기판정…위·비장·림프 제거 수술…3차부턴 비급여 치료

딸 태양희씨는 엄마 유태옥씨가 항암 치료실로 들어가기 전 손을 잡고 울먹였다.

“엄마 제발 오래 버텨줘….”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찾은 강남의 한 대학병원. 중국에서 온 딸 태양희(33)씨가 엄마 유태옥(65)씨의 손을 꼭 붙잡고 간절히 말한다.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기약 없는 치료로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맺힌다. 엄마가 아픈 게 꼭 자신 때문인 것 같다.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기에…. 이런 딸을 볼 때마다 유씨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딸의 어깨를 다독인다. 마치 괜찮다는 듯이.

가난은 평생 유씨 가족을 괴롭혔다.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그는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건 결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네 사정이 다 비슷하다보니 결혼 후에도 먹고 사는 것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남편과의 성격이 맞지 않아 갈등도 잦았다. 고성이 오갈 때마다 딸 양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유씨는 남편과 이혼을 한 후 5살배기 딸을 친정에 맡기고 돈벌이가 된다는 도시로 떠났다. 도착한 곳은 심천. 유씨는 15년 동안 한국공장 내 식당에서 일했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진흙탕 속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머리속에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방문 취업 비자를 발급받은 유 씨는 2006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도착해 인천에 있는 한 납땜 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한국어 사용이 능숙하지 못했기에 힘겨움과 스트레스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중국에 있는 딸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한국어도 조금씩 늘고, 업무도 손에 익으면서 유씨를 향한 차가운 시선은 차츰 사라져갔다. 한국생활에 적응해 갈 때 쯤 동료의 소개로 새로운 가정도 꾸렸다. 행복한 날들만 계속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정했던 남편은 결혼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시도 때도 없이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어느 날부터는 다니던 회사도 그만둔 채 술독에 빠져 살았다. 생계는 오로지 유씨의 몫이었다. 중국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다. 남편은 항상 “돈 벌어와!”라고 소리쳤고, 유씨는 그렇게 지옥 같은 8년을 묵묵히 감내했다.

2015년 남편과 이혼 후 김포로 이사간 유씨는 실리콘 공장에 재취업했다. 200도가 넘는 기계 앞에서 실리콘을 플라스틱 통 크기만큼 붙이는 일이었다. 냄새와 열기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딸이 한국에 들어올 날이 얼마남지 않았기에 힘든 것도 잊었다. 딸과 헤어진 후 처음으로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딸은 취업에 성공하고, 유 씨도 조건이 조금 더 좋은 화장품 제조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월급도 꼬박꼬박 나왔고, 보너스도 받았다. 둘이 살기에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진 않았다.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딸이 5살 때 제가 도시로 나간 이후로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어요. 엄마 없이도 잘 큰 딸을 보면서 아직도 딸에겐 미안한 마음이 크죠. 엄마가 필요할 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제야 엄마 노릇 좀 하려고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부터 집에는 웃음소리 대신 엄마 유씨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만 가득했다. 원래 소화기능이 약한 탓에 소화제를 달고 살았을 뿐 건강검진 상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2021년 들어 증상이 더 심해졌다. 뱃속에 뭔가가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는 음식을 먹지 못할정도였다. 동네 내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복통이 심해지자 딸과 함께 김포에 있는 한 종합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았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생각도 한 결과였다. 의사는 암 덩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딸의 부축을 받고 겨우 병원 밖으로 나온 유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태씨는 집으로 돌아가 암 관련 도서를 사서 읽고, 위암 분야 권위자가 있는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 했다. 강남 모 대학병원이 위암 수술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집과 병원의 거리는 꽤 멀었지만 엄마의 수술을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단 항암치료를 먼저 진행하고 암 세포의 크기가 줄어들면 그때 수술을 결정하자고 했다. 유씨는 4개월 동안 독한 항암치료를 받았다. 몸무게는 무려 12kg이나 빠졌다. 딸은 휴직계까지 낸 채 엄마 병간호에 매달렸다.

간절함과 강한 의지 덕분이었을까. 치료제가 효과를 보면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2일 위와 비장, 림프를 제거하고 식도에 소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9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성공적이었다. 의사는 4~5번 항암치료를 받으면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하늘은 참 무심했다. 2개월 뒤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 이젠 수술도 불가능이었다. 오로지 표적 치료를 통해 암 크기를 줄이는 방법밖엔 없다고 했다. 손발 저림과 구토 증상 등 항암부작용까지 오면서 유씨는 하루하루 힘을 잃어 간다.

모녀의 발목을 잡는 건 하나 더 있다. 바로 돈이다. 30여 차례 걸친 항암 치료는 보험처리가 돼 딸이 모아온 돈으로 병원비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었지만 3차 치료부터는 비급여다. 치료 한 번에 250만원. 수입이 없는 모녀에겐 크게 부담스런 액수다. 손을 벌릴 곳도 없다.

이토록 기구한 삶이 있을까.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의 딸, 두 번의 이혼, 어린 딸과의 생이별, 그리고 위암 말기 환자…. 배가 고파서, 살고 싶어서, 조금 더 사람대접을 받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았지만 유씨에게 남은 거라곤 아픈 몸뿐이다.

그래도 이겨내 딸과 함께 오래살고 싶다고 말하는 유씨. 이제 이들 모녀가 애타게 꿈꿔온 희망은 불보살님의 가피와 불자들의 자비온정에 달렸다.

모금계좌 농협 301-0189-0372-01 (사)일일시호일. 070-4707-1080

일일시호일  kkkm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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